미국 메디컬 드라마의 압도적인 수준을 보여준 작품은 단연코 1994년에 방영하기 시작한 'ER'이다.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 출신의 소설가 마이클 크라이튼과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손을 잡고 만든 야심작으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어도 정말 멍할 정도로 정신을 놓게 되는 치열한 완성미를 보여준 작품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흔하지 않던 멀티 캐릭터의 멀티 이벤트를 하나의 에피소드에서 얼개를 짜서 프레임에 멋들어지게 완성해나가는 연출력이 시청자들의 열화와 같은 호응을 얻어낸 작품으로 남는다.
'그레이스 아나토미'는 10년 이상 'ER'에서 갈고 닦아 숙련된 미국 메디컬 드라마의 원숙미를 드러내는 작품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을 책임져야 하는, 현대적인 의미에서 가장 신에 가까운 직업윤리를 드러내야 하는 의사들의 삶.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들에게도 인간적인 면에서의 갈등과 사랑은 늘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한다. '그레이스 아나토미'는 의사들의 삶과 사랑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이제 막 의국에 들어선 초짜 의사들인 인턴들의 모습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말 그대로 피 튀기는(?) 현장에서 급박하게 돌아가는 의사들의 인생에 풋내기 의사들 또한 예외적인 존재일 수는 없다. 일도 배워야 하고 사랑도 쟁취해야 한다. '그레이 아나토미'는 그 치열한 과정을 젊은 감각의 트렌디한 분위기로 풀어나간다. 네 명의 인턴들이 주도해나가는 이야기는 흥미진진함에 유쾌하고 흐뭇한 기분까지 안겨준다.
시리즈가 거듭되면서 메디컬 드라마 본연의 속성에서 캐릭터들의 로맨스로 무게중심이 이동한 연애물로 전락했다느니, 주연배우들의 하차가 반복되며 몇 년마다 한 번씩 물갈이를 하면서 궁여지책으로 드라마를 이어나가는 과거 'ER'의 방영 시스템을 답습하고 있다느니 하는 비판도 없지는 있지만, 미국 TV 드라마의 존폐를 결정짓는 18-49세 시청률이 매 시즌 전체 10위 안에 들 정도로 강력한 광고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드라마이다. 이 정도면 과거의 'ER'처럼 잘 하면 20년 이상 ABC를 먹여 살릴 수 있는 간판작이 될 분위기로, ABC에서 절대 '그레이 아나토미'를 내려 놓지 않는 이유가 백분 이해가 가는 상황이다.
2007년도에는 TV 드라마의 아카데미상이라고 할 수 있는 프라임 타임 에미상의 드라마 부문 남녀 조연상 후보에 '그레이스 아나토미'의 시리즈 캐스팅 멤버인 조지, 이지, 크리스티나가 모두 후보에 올라 이지 역의 캐서린 헤이글이 수상에 성공하기도 했다. '그레이 아나토미'가 이렇게까지 재미가 있어도 되는 것인지에 대한 해답이 바로 여기 있다. 조연들의 잔치, 서투르지만 최선을 다하는 인생, 서로의 어깨를 두들겨주고 손을 맞잡아 주는 천연덕스러운 사랑. 역시 인생은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는 거야. '그레이스 아나토미'가 친근하게 제시하는 미덕이다.
'그레이스 아나토미' 타이틀 카드
'그레이스 아나토미' 시즌 1 오프닝 시퀀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