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에 들어선 NBC의 프로그램 리스트에는 변명의 여지없이 캔슬이 당연지사에 떡잎조차 안 보이는 드라마도 다수 있었지만, 다른 방송국에 갔으면 그토록 단명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농후해 보이는 작품들도 많았다. 프라임 타임 중의 프라임 타임인 목요일 저녁 시간을 장악했던 저 유명한 시트콤들과 'LA 로' 'ER' '웨스트윙' 같은 드라마들을 통해, 1990년대의 대부분을 두 자리 숫자 성장률로 장식했던 NBC는 어느 날 갑자기 넘버 원 방송국에서 5대 방송국 중 하나로 급전직하 추락했다.
2006년 가을 시즌에 NBC의 오랜 슬럼프에 단비를 뿌려준 것은 뜻밖에도 SF인 '히어로즈'였다. '미디엄'이 그간의 색채에 약간 색다른 기호를 첨하가기는 했지만, 대체로 전통적인 드라마에 치중해 오던 NBC가 Sci-Fi라는 SF 전문 채널을 따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중파 월요일 9시 프라임 타임에 이 드라마를 전진배치한 것은 누가 보아도 엉뚱하고, 뜻밖의 선택이고, 모험이었다. 하지만 결과 역시 뜻밖이었다. 2006년 9월 25일 방영된 시리즈 프리미어 에피소드가 근 5년 간 NBC 드라마 프리미어 중 가장 좋은 성적인 1,430만 명의 시청자를 확보하며 빅히트의 조짐을 보인 것이다.
장르 드라마, 특히 한 번 보고 끝나는 것이 아닌 TV 연속극에서 장르 드라마는 마니아 외의 광범위한 시청자 층을 모을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게다가 한창 만화책을 읽을 때인 남자 청소년들이 주 소비자 층인 SF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히어로즈'는 바로 그 지점에서의 정공법을 택했다. 슈퍼휴먼으로서의 능력을 발견해가는 보통 사람들의 성장을 그리기 위해 '히어로즈'는 미국 코믹북의 미적 스타일과 기법, 스토리텔링을 그대로 빌어온다.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초능력자들이 등장하고, 주요 배역 가운데 하나를 만화가로 설정해서 그의 만화를 계속 보여주며, 심지어는 타이포그래피도 만화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아무리 심하게 다쳐도 금방 새 살이 돋고 목숨이 끊어졌다가도 살아나는 치유능력의 여고생 클레어는 아홉 살 때라면 비범한 능력 덕분에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어깨를 으쓱거렸을 법도 하지만,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 더없이 무서운 짐이 되고 친구들에게 괴물 취급을 받을까봐 전전긍긍하는 사춘기 소녀이다. 그리고 제지회사 직원으로 위장한 채 초능력자들과 관련한 비밀조직 “컴퍼니”에서 일하는 클레어의 양아버지는 그런 딸이 실험실의 기니피그가 되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비밀을 지켜야 한다.
'히어로즈' 시즌 1 프리미어 프로모션 트레일러
수배자로 쫓기는 남편 걱정에, 아이 양육에 눌려 사는 니키는 동영상 매춘을 하며 어떻게든 삶을 살아보려 하지만, 자신을 거울 속에 가둬놓고 시시때때로 제 몸에 들어가 해결사 노릇을 하고 다니는 엄청난 완력의 도플갱어 제시카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든다. 열 살 남짓한 어린 나이에도 곱게 자랄 사정이 못 되어 어른들의 복잡한 세계를 들여다보고 말았고, 제시카의 존재까지 알게 된 니키의 아들 마이카는 기계를 제 뜻대로 다루는 능력을 숨겨야 한다.
J.J. 에이브람스의 절친 그렉 그룬버그가 분한 남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경찰관 매트 파크먼도 있다. 범죄자를 잡게도 해주지만 아내가 바람피운 사실까지 알게 해주는 능력이라면, 그 능력이 반갑고 소중하게만 여겨질 수 있을까?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결코 건전한 정신상태를 유지할 수가 없다. 그리고 약에 취한 상태에서 미래를 그리는 화가 아이작 멘데스는 자신을 떠난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그리고 나서 망연자실에 빠진다.
생각을 읽는 능력자 매트 파크먼
자신이 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았으면서도, 정치적 야망을 위해 그 사실을 숨겨야만 하는 네이선 페트렐리는 또 어떠할까? 그에게 자신의 능력은 아직까지 정치가로서 가진 수많은 비밀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많은 초능력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할 네이선의 동생 피터 페트렐리는 자신의 능력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다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방황하며 해결책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한다.
시공간을 옮겨 다니는 능력의 나카무라 히로 정도가 제 능력을 알고 나서 마냥 기뻐하는 유일한 캐릭터이다. 그는 어느 날 자기에게 텔레포트 능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정말 해맑고 단순하게 기쁨에 빠진다. 미래에 갔다가 대재앙이 터진 것을 보고,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여 영웅이 되어야겠다고 뭣 모르고 다짐하는 순박한 인간이 바로 '히어로즈'에서 가장 만화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는 히로이다.
뉴욕 타임스퀘어로 타임슬립을 해서 '야 타!'를 외치는 오렌지족 히로
슈퍼맨이나 배트맨, 스파이더맨 같은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하는 초영웅에게도 고뇌는 있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즐거워하고 슬퍼하는 평범한 인간들이 부럽고, 그들과 어울리기 위해서 자신의 정체를 숨겨야만 하는 고충이 그러하다. 그래도 그들은 '베를린 천사의 시'의 천사처럼 지상으로는 결코 내려올 수 없음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괴로워하면서도 임무는 완수해야 한다. 그들에게 운명이란 결코 뿌리칠 수 없는 것이니까.
그런데 평범한 사람들에게 능력이 주어지게 되면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꼭 생기게 마련입니다. "노바디"에서 "썸바디"가 됐다는 자각을 사악한 용도에 쓰는 인간이 나타나지 않으면 인간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없다. '히어로즈'에는 히로가 능력을 되찾기 위해 찾아다니는 검에 새겨진 헬릭스 상징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것의 의미는 "신이 보낸 위대한 인재"라는 의미이다. 거기에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인간이 되기 위해, 다른 능력자들을 살해해서 그들의 능력을 흡수하는 사일러라는 살인마가 포함된다.
겹겹이 둘러싼 캐릭터와 사건에 자칫 복잡해질 수 있는 스토리를 한데 모아주는 것은 독특한 시나리오 집필 방식 덕분이다. 이 드라마의 작가들은 팀을 나누어 각각의 에피소드를 따로 쓰는 일반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고, 전부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각 캐릭터를 중심으로 팀이 나뉘어, 한 팀이 해당 캐릭터에 관련한 장면만 쓰는 방식을 고집했다. '로스트', '위기의 주부들'의 빅히트 이후 멀티 캐릭터, 앙상블 캐스트 방식이 워낙 인기를 끈 점도 있지만, 히어로즈는 그 중에서도 완벽하게 다르면서도 같은 고민을 가진 슈퍼 히어로 인간들의 내면을 묘사해야 하는 고난이도의 과제가 있었지만, '히어로즈'의 결과적으로 모든 작가가 모든 에피소드 집필에 참여하는 독특한 각본 집필 방식은 각 캐릭터의 중심을 세우고 확실한 색깔을 입히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된다.
'히어로즈' 시리즈 피날레 프리뷰 영상
첫 번째 시즌의 빅 히트 이후 소포모어 징크스를 극복하지 못 하고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시즌에서 시청률의 하락세가 이어졌지만, 그래도 SF 드라마의 속성상 마니아층이 굳건하고, 코믹스나 관련 프렌차이즈 상품의 판매가 호조를 보여서 다섯번째 시즌도 근근히 이어질 줄 알았지만, 2010년 5월 낮은 시청률을 극복하지 못 하고 결국 '히어로즈'는 4시즌 만에 드라마를 접게 된다.
첫 번째 시즌을 종료한 2007년 골든 글로브와 프라임 타임 에미상 드라마 부문 작품상을 포함해서, 감독, 촬영, 음향효과, 특수촬영 등의 다양한 분야에 노미네이트되었지만 단 하나의 수상에도 실패하면서 장르극에 대한 몰이해라고 팬들의 원성이 사기도 했지만, 2006년 말 타임지가 뽑은 올해의 인물중의 하나로 '히어로즈'의 배우들이 뽑히며 화제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