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서점과 식료품 가게가 있는 드라마, 엄마와 딸을 위한 최고의 미드 '길모어 걸스'

미국 동부 지역을 차로 여행하는 가장 좋은 루트는 그 유명한 95번 고속도로를 타는 것이다. 동부의 유명 관광지나 도시의 90퍼센트 이상이 미국의 최북단인 메인 주에서 최남단 플로리다까지 관통하는 95번 고속도로와 30분 거리 안에 있을 정도니 괜한 소리가 아니다. 

 

메인 주에 사는 열혈 야구팬이 메이저리그 스프링 캠프를 보기 위해 플로리다에 간다거나, 아이비리그행에 성공한 고등학생들이 입시 준비할 때보다 더 치열할 대학생활을 앞두고 마지막 방종을 경험해 보고자 마이애미행을 결정했다면, 95번 고속도로를 타고 내리 3박 4일 정도를 쉬지 않고 운전하면 목적지에 가닿을 수 있다.

 

 

 

 

이 95번 고속도로로 진입 가능한 여러 도시 중에서도 특히나 미국 드라마에서 자주 찾아 볼 수 있는 구간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에서 뉴욕까지의, 차로 3~4시간 걸리는 구간이다.

 

'보스턴 리갈' '앨리 맥빌'의 도시 보스턴과 '섹스 앤 더 시티' '로 앤 오더' 'FBI 실종 수사대' '가십걸' '수츠' '화이트 칼라'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 등등 적어 보자면 끝이 없는 도시 뉴욕이 주로 메트로폴리스에서 벌어지는 형사나 변호사들과 같은 전문직 종사자의 삶을 그리고 있다면, 그 중간에 끼어 있는 작고 한적한 마을들은 미국 동부인들의 생활 양태에 근거한 패밀리 드라마의 배경으로 자주 이용이 된다. 

 

보스턴 근교의 한적한 해안 도시인 케이프사이드를 배경으로 하는 '도슨의 청춘일기'나 코네티컷 페어뷰의 위스테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위기의 주부들'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길모어 걸스' 시즌1 오프닝 

 

2000년 첫 방송을 시작한 '길모어 걸스' 또한 코네티컷의 작은 가상의 마을인 ‘스타스 할로우’를 무대로 하고 있다. 만 명도 채 되지 않는 주민 숫자가 입구의 지명 입간판 밑에 지그시 적혀 있는 이 마을은 신호등도 없어서 사람들과 차량이 암묵적인 눈인사로 적당히 대화하는 곳이며, 미국의 여느 시골마을처럼 초고속 인터넷보다는 다이얼-업 모뎀이나 쓸까 말까한(그때는 2000년대 초반!) 곳이고, 이웃집 고양이가 죽으면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조문을 오는 곳이며, 시시콜콜한 가십은 한 시간 정도면 온 마을 사람들에게 퍼지는 곳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미국 동부의 프린스턴 대학의 초청을 받아 3년 여를 살며 경험했던 시절의 '슬픈 외국어'를 따와 보자면, 온 마을 사람들이 도넛과 맥주를 손에 들고 모여 '트윈 픽스' 종영 기념 파티를 벌이는 게 그 해 6월의 가장 큰 마을 행사일 법한 미국 동부의 전형적인 스몰 빌리지가 바로 스타스 할로우이다.

 

 

 

 

그러니 그런 작은 마을에 구경거리가 뭐가 있겠느냐고 한다면, 위에서 이미 몇몇 들었듯이 반증할 예는 얼마든지 있다. 이방인이 사나흘 머물며 재미를 보기에는 아무래도 대도시가 낫겠지만, 심심하기만 할 것 같은 작은 마을 풍경이 그곳을 아주 잘 아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이야기로 꾸며져 나온 드라마를 보자면 일종의 평온함 같은 것이 느껴진다.

 

왜 아니겠는가? 유혈 낭자한 역사의 소용돌이와 우주 속의 처절한 생존투쟁, 날로 사악하고 극악해져 가는 범죄자들의 두뇌와 맞서야 하는 수사관들의 고충을 내내 보다가, 똑같이 작은 마을을 그리고 있으되 '트윈 픽스'나 '위기의 주부들'에 등장하는 음모의 자취조차 없는 착한 드라마를 군데군데 끼워 넣어서 보고 있자면 달콤하기 짝이 없는 잠 같은 안도감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너무 험한 것만 보아온 탓일까? 어찌 보면 그 착함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특히 어떤 부분이 비현실적이냐 하면 주인공인 길모어 모녀의 관계이다. 엄마와 딸 사이만큼, 자기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말도 안 될 정도로 큰 기대를 걸고 위안을 찾으며 기댈 수 있는 관계는 없다. 언제든지 잘만 풀린다면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 있는 사이이기에 가장 야만적인 방식으로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이기도 하지만, 하물며 엄마가 이 세상의 거의 전부인 어린아이도 아니고, 이젠 철 좀 들 만한 나이의 다 자란 딸도 아니고, 틴에이저 딸과 엄마의 관계가 그토록 비옥하다는 것은 꿈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쯤 되기 때문이다.

 

열여섯의 고등학생이 임신하여 낳은 딸이 열여섯이 되는 시점에서 이 드라마 '길모어 걸스'는 시작된다. 딸 로리 길모어는 저런 딸이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낳아서 키우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예쁜 짓 덩어리에, 할아버지인 리처드 길모어의 PPL격 비유를 빌리자면 “혼다자동차처럼 말썽이 없고 손이 가지 않는” 명민한 아이이다.

 

로리 길모어는 한때 한국에서 단백질인형녀의 전형으로 화제를 탔던 알렉시스 블레델이 분하고 있는데, 싱글 맘 슬하에 자라면서, 책벌레에 조숙하고 영민한 그런 전형적인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소화해내고 있다. 로리는 인생의 목표가 하버드에 가는 것이되, 목표와 그것을 이루겠다는 스트레스 때문에 가족과 친구들을 나 몰라라 하지 않는 속 깊고 사랑스러운 캐릭터 그 자체이다.

 

로리의 엄마인 로렐라이 길모어에 대해서는, 열여섯 살짜리 고등학생이 낳은 아이니 애가 애를 키우는 셈이고 그 좋은 시절을 애 키우느라 보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냐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그 나이에 참 큰 보람을 이루어냈구나 하는 판타지에 빠지게 될 정도라고 할까.

 

 

'길모어 걸스' 시리즈 피날레! 굿바이 스타스 할로우!!

 

 

엄마인 로렐라이 길모어 자신도 학창시절에는 우수한 학생이었고 학문의 꿈을 드높이 품고 있었으나, 예기치 않은 임신으로 진로를 전면 수정해야 했던 인물이다. 로렐라이는 코네티컷의 부유한 사교계 인사이면서 자신을 통제하려 들었던 부모님과 반목을 지속하던 끝에 아이를 낳아 부모가 바라는 인생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었지만, 자기가 자랐던 방식과는 다르게 아이를 키우겠다고 결심하면서도 신념과 기준이라고는 '아무런 신념과 기준 없이 무조건 자유롭게만 키우면 된다'는 것밖에 없어서 자식들로부터 오히려 조롱을 받는 60년 세대의 부모와는 또 다른 원칙과 현명함을 가지고 딸과 교류를 한다.

 

다만 '다마 앤 그렉'의 다마 캐릭터를 별로 다른 점 없이 리바이벌한 듯한 캐릭터가 개인적으로는 딸 로리 역할보다 신선함이 좀 떨어진다 싶기는 하지만, 조숙한 자식과 허술한 데가 많은 엄마라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수도 없이 써먹은 구도 자체가 어른스러운 아이에게 더 정이 가게 마련이지 아닌가싶다.

 

엘리자베스 여왕을 벤치마킹하는 듯한 차림새로 언제까지나 얼어붙어 있을 것만 같은 또 다른 길모어 걸이자 로리의 할머니인 에밀리 길모어는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자식과는 달리, 무조건 예뻐해 주기만 하면 되고 또 무조건 예쁘기만 한 손녀와의 관계에서 기쁨을 되찾아 나가면서 자신의 색다른 면모를 발견하고 드러낸다. 그렇게 보면, 자기 세계에 대해 가장 완강한 사람은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의식적으로 자유를 꿈꾸던 로렐라이 길모어이다.

 

'프렌즈'에서 뚱뚱한 모니카를 그대로 가져다가 아예 캐릭터로 정착시킨 듯한 수키, 뉴잉글랜드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라면 빠질 수 없는 무뚝뚝하고 심통 맞은 캐릭터이나 로렐라이에게는 순정을 보이는 루크, 문자 그대로 시대별 록 뮤직을 모조리 섭렵하는 한국계 미국인이자 로리의 친구인 레인 김, 올누드로 깎은 헤어스타일이 왠지 '스타트렉'의 스팍을 연상시키는 ‘인디펜던스 인’의 프런트 담당 미셸에서부터 자타칭 마을의 이장 선생님인 테일러, 스타스 할로우의 공식 확성기인 패티, 아다치 미츠루 만화에서 만화가 아다치처럼 중간중간 등장해서 화면을 전환하는 거리의 악사까지, 고만고만하고 이런저런 괴짜들이 거짓말 별로 안 보태고 '섹스 앤 더 시티'의 물경 두 배가량에 해당하는 대사를 속사포처럼 쏟아내며 지긋지긋하고 정겹고 때론 성가시기도 하며 모든 사람이 서로의 존재를 알아주는 마을의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드라마가 '길모어 걸스'이다.

 

'길모어 걸스'는 2000년 과거 워너브러더스 채널에서 시작되어 방영을 하다, 채널이 UPN과 통합을 하며 CW 채널의 효녀 프로그램으로 7년 동안 장수를 누린 후, 2007년 5월 로리, 로렐라이 두 주연 여배우와의 계약이 체결되지 않으면서 시리즈를 종영하게 된다. 일곱 시즌을 방송하는 동안 전체 시청자 수로는 모두 100위권 밖의 시청률을 기록했지만, 시즌1에서 시즌4까지가 18세에서 25세 여성 시청률이 전체 1위를 기록할 정도로 젊은 여성 시청자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드라마이다. 
 

2004년 네 번째 시즌의 7번째 에피소드인 'The Festival of Living Art'로 프라임 타임 에미상 분장상 부문에 단 한 차례 노미네이트되어 수상에 성공해서 노미네이트 대비 수상 비율 100%로 이 부문 최강의 전설을 보유하고 있다. '길모어 걸스' 주제곡 'Where You Lead'는 팝가수 캐롤 킹이 온전히 '길모어 걸스'를 위해 본인의 1971년도 히트송을 딸과 함께 다시 녹음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무리 인구 만 명이 안 된다지만 스타벅스와 맥도널드 하나 눈에 띄지 않으며, 월마트나 반스 앤 노블 하나도 없는, 자그마한 그 옛날의 식료품 가게가 서점과 함께 유쾌하게 버티고 있는 마을 스타스 할로우에서 간만에 포근한 판타지를 느껴보는 드라마, 주제곡에서부터 구성까지 엄마와 딸을 위한 최고의 미드, 바로 '길모어 걸스'이다.

 

 

 

 

 

로리는 공부도 잘하지만 연애도 잘해요! '슈퍼내추럴' 샘이랑 사귀었죠

 

 

그러다 나쁜 남자로 나오는 '히어로즈' 피터와도 사귀죠!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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