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문 안의 일은 아무도 모른다, '위기의 주부들'

'로스트' '그레이 아나토미'와 '위기의 주부들'은 리얼리티 쇼와 스타 뽑기 프로그램의 거센 공세 속에서도 초반 서너 시즌까지 전미 프로그램 시청률 톱20에서 항상 최상위권을 꾸준히 유지했다. 그중에서도 '위기의 주부들'은 'CSI 과학수사대'와 더불어 리얼리티 쇼를 제외한 순수 드라마 순위로는 1, 2위를 놓치는 법이 거의 없었다.


'위기의 주부들'이 불러일으킨 화제는 시청률뿐이 아니었다. 스토리 외적인 요소가 시시각각 관심의 표적이 된 드라마가 '위기의 주부들'이다. 주연배우들은 마침 막을 내린 '섹스 앤 더 시티'의 대를 이어 패션 아이콘이 되었고, 일종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에서는 드라마로 벼락 스타가 되는 경우가 많지 않다. 또 애초부터 몸값 비싼 스타가 등장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맞다. 스타를 쓴다고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 설령 성공한다고 해도 장기적으로 가는 시리즈 드라마에서 비싼 개런티를 감수해야 하는 스타 캐스팅은 연출이나 제작까지 겸하는 원 톱 배역의 시트콤을 제외하면 그다지 큰 이점이 없다. 영화 한 편에 수천만 달러씩을 챙기는 대스타가 몇 년씩 묶여 있어야 하는 장편 드라마에 마음을 줄 리도 만무하다.


물론 캐릭터에 매력을 부여해야 함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보통 장거리 주행을 하는 미국 드라마는 스토리와 짜임새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작정하고 특정 배우를 스타로 만들어주려고 애를 쓴다거나 혹은 우연하게라도 스타성을 거저 얻게 되는 상황은 하늘의 별따기요 무쇠 갈아 바늘 만들자는 심보이다.

 

 

'위기의 주부들' 시즌1 오프닝 시퀀스 

 


그래도 요즘 같아서는 거물들이 텔레비전 드라마에 관심을 보이는 경우가 늘고 있지만, 그것도 미니시리즈 정도다. 그런데 그 드문 “행운”을 '위기의 주부들'의 출연진이 잡았다. 잡지마다 그들이 입었던 옷을 연구 분석하고, 그들의 사생활이 연일 타블로이드를 장식한다. '오프라 윈프리 쇼'나 '닥터 필 쇼' 등 토크쇼도 앞 다투어 이 드라마와 관련한 내용을 다루거나, 현실의 위기의 주부들을 출연시키기도 했다.


소프 오페라에 미스터리와 스릴러, 코미디를 적절하게 섞은 극의 형식도 많은 찬사를 이끌어 냈고, 시청률 면에서도 ‘위기의 주부들’의 지지에 힘입어 보증수표격의 열광을 이끌어 냈으며, 비평가들의 호평과 쏟아지는 상복에 입을 다물 수 없는 상황을 연출했다.


그 배우들이 교외의 어느 평화롭고 윤택한 마을의 중산층 주부를 연기한다. 마을이라고 할 것도 없이, 우편물 주소에 “위스테리아 레인”이라는 한 거리 이름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그 작은 무대에서 어느 순간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품고 살아간다. 겉으로는 더없이 평화롭다. '위즈'에 등장하는 마을처럼 남편들이나 부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시도 때도 없이 마리화나를 피워 무는 것도 아니고, 총과 칼이 난무하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속으로는 아비규환도 그런 아비규환이 따로 없다. 곪아도 단단히 곪아 있는 것이다. '오프라 윈프리 쇼'는 윈프리가 부푼 기대를 품고 위스테리아 레인에 이사를 갔다가 이 말썽 많은 거리에 진저리를 치고 야반도주하는 패러디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 드라마의 태그라인은 “누구에게나 작고 더러운 빨랫감 하나씩은 있다”이다. 때 묻은 자신의 빨랫감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이들의 빨랫감에는 하루 흘린 땀으로 묻은 때뿐 아니라 약간 더 음흉하고 은밀한 때, 피가 묻어 있다.


화창하기 이를 데 없는 어느 날, 위스테리아 레인의 어떤 집에서 한 발의 총성이 울린다. 사랑하는 아들과 남편을 두고,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처럼 보이던 메리 앨리스가 자살을 했다. 저 세상에 간 메리 앨리스가 동네 친구들의 닫힌 문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한다. 자신도 그랬지만, 이제 와 들여다본 친구들의 삶은 더더욱 요지경 속이다. 그녀의 내레이션으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위기의 주부들' 시리즈 피날레 플래시백 영상 

 

그러니까 스토리는 생활은 윤택하지만 무료한 중산층 마을의 생활에서 구멍 난 욕구를 채워보려고 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거의 모든 인물들이 법적으로 중범죄를 지을 뿐더러, 위기를 무마하고 입방아에 오르지 않으며,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을 잃지 않으려고 더 큰 죄를 지으면서 더 큰 위기를 자초하는 쳇바퀴에 빠져버리고 만다. 그래서 작은 마을 특유의 풍습, 즉 남의 집 닫힌 문 안쪽의 이야기에는 귀를 쫑긋 세우지만, 자기의 피 묻은 빨래는 문 밖을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필사의 노력을 기울인다.


뺑소니가 미궁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누군가의 입을 막기 위해 살인이 벌어지며, 방화를 하고 살인자를 숨겨주고 정원사와 바람을 피우고 횡령을 한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 어떤 짓까지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이 드라마는, 그래서 주 시청자 층이 절박한 주부라고는 해도 감정이입을 위한 드라마는 아니다. 소개에 블랙 코미디라는 말이 자주 들어가는 것처럼, 극의 분위기는 종종 냉소적이고 싸늘하기까지 하다.  


물론 코믹스러운 패러디였다고는 해도, 오죽 징글징글했으면 오프라가 야반도주까지 했겠는가?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을 따라 입고 싶을지는 몰라도, 내 인생이 저들의 것과 다름이 없구나 하며 한숨 어린 공감을 하게 되지는 않는다. 줄거리는 재미있게 따라가지만, 한 편으로는 부럽고 저렇게 살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들 만큼 환상을 심어주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교훈까지 주는 면이 있다고나 할까? 요컨대 비주얼에서 많은 비교가 되었던 '섹스 앤 더 시티'와는 들여다보면 달라도 한참 다르다. 


각자 저마다의 비밀을 필사적으로 막느라 바빠서, 길게는 십수 년을 한 거리에서 살아왔다는 친구들의 우정은 겉돌고 파편적이다. 사건, 사고에 얽힌 미스터리가 이 드라마를 계속 보게 해주는 흥미 있는 요소로 여전히 건재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것이 드라마다 보니 사건, 사고가 과장되어 있는 점을 감안한다고 해도, 현실을 예쁘게만 포장하지는 않는 이 드라마의 장점으로 작용한다.

 

 

 


주는 것 없이 예뻐야 할 테리 해처의 캐릭터 수잔 마이어가 일각에서는 어쩐지 주는 것 없이 미움을 사기도 한다. 덜렁이에 착하지만, 자기는 의도하지 않았는데 남에게 상처를 입히고, 의도하지 않았는데 친구의 남자친구에게서 유혹을 받으며 희생자 역할을 하는 인물은 적어도 현실의 “위기의 주부들”에게는 동정표를 얻기가 힘든지도 모른다. 가장 허술해 보이는 인물이 가장 손해를 덜 보고 있는 셈으로, 남들은 무언가 엉망진창으로 되고 만 것을 하나같이 진땀을 흘리며 수습하고 있는 와중이니까 말이다. 

 

 

 

 

텔레비전 드라마이고 코믹적인 요소로 과장된 면이 있기는 하겠지만, 극적인 요소가 가장 강한 캐릭터는 마샤 스튜어트가 울고 갈 “완벽 엄마” 브리가 아닐까 한다. 브리 역을 맡은 마샤 크로스의 연기도 워낙 출중하다.

 
표면적으로 봐서는 피임에 실패하여 아들을 넷이나 낳고, 이 악동들을 감당하지 못하여 쩔쩔 매고 사는 르네가 가장 현실적으로 보인다. 결혼하기 전에는 잘 나가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남편보다 능력도 좋았지만 육아 때문에 일을 접게 된 이래로 집에 들어앉게 되고 만 르네 역의 펠리시티 호프먼도 만만치 않은 연기를 보여준다.

 

 


하지만 과도하게 남을 의식하고 강하고 능력 있는 주부로 보이려고 애쓰는 완벽주의자 브리는 푸념 한마디 없이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 그런 그녀의 삶은 어찌된 셈인지 친구들 중에서도 가장 꼬이고 무너져간다. 그리고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해결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그녀의 문제는 그 누가 안고 있는 문제보다 강한 폭발력으로 터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미스터리에 강하게 기대고 있는 전반적인 줄거리에서, 브리에 관한 이야기는 “위기의 주부들”에 관한 가장 현실적인 초상이다.


제작자 마크 체리는 이 드라마의 기획안을 들고  HBO, NBC, CBS, FOX 등의 방송국을 전전했지만 모두 퇴짜를 맞았다. 뭐가 잘되려고 해도 단단히 잘되려고 했던 건지, 결국 ABC에 안착한 이 드라마는 ABC의 재건과 부흥이라는 시대적인 아이콘 역할을 맡으며 순풍에 돛을 달고 대항해 시대를 펼치며 2000년대 ABC를 상징하는 드라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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